금감원, 채권형 랩·신탁 위법 관행 무더기 적발 “증권사들, 고객 채권 수천억 손실 돌려막아”

주요 증권사 9곳서 불법 자전거래 적발, 최대 연 6천번 돌려막은 사례도
금감원, 관련 운용역 30명 주요 혐의사실 수사당국에 통보할 방침
채권 투자 손실에 대해 손해배상 절차 들어간 증권사도 있어
증권사

국내 주요 증권들이 일임형 자산관리 상품인 채권형 랩어카운트(Wrap Account·랩)와 특정금전신탁(신탁) 운용에서 발생한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채권 손실을 다른 고객에게 전가하는 등 위법 관행을 이어온 사례가 무더기로 적발됐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이후 채권시장 불안이 급증함에 따라 그간 증권사들의 수익률 보전 의혹이 속속 제기된 바 있다. 금융감독원은 증권사 운용역 30여 명의 업무상 배임 소지가 있는 행위에 대해 주요 혐의 사실을 수사당국에 제공하고, 회사에 따라서는 최고경영자(CEO)까지 행정 처분 대상에 포함할 방침이다.

금감원, ‘채권형 랩·신탁 검사 결과’ 발표

17일 금감원은 NH투자·미래에셋·하나 등 증권사 9곳의 채권형 랩과 신탁 업무실태를 집중 점검한 결과, 자전거래 등 각종 위법과 리스크 관리·내부통제 미비 사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고객 계좌의 손실을 다른 고객 계좌로 전가하거나 투자손실을 증권사 고유자산으로 보전해 주는 불법 자전거래(자기 스스로 매도·매수 주문을 내는 것)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이날 금감원이 발표한 ‘채권형 랩·신탁 검사 결과(잠정)’ 자료에 따르면 9개 증권사 모두 만기도래 계좌의 목표수익률을 달성하기 위해 자전거래로 고객계좌 간 손익을 이전해 왔다. 가령 A증권사가 고객 계좌의 만기가 도래한 기업어음(CP)을 시가보다 비싼 가격에 B증권사에 매도하고, 그 대신 B증권사의 다른 계좌에서 만기 등이 유사한 다른 CP를 A증권사 내 만기가 오지 않은 고객 계좌로 비싸게 사주는 방식이다.

한 증권사는 이런 방식으로 지난해 7월부터 다른 증권사와 총 6,000여 회의 연계·교체 거래를 진행함에 따라 특정 고객 계좌의 CP를 다른 고객 계좌로 고가 매도하는 등 약 5,000억원 규모의 손실을 고객 간 전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증권사별 손실 전가 금액은 수백억원에서 수천억원 규모로, 이는 거래 당시 한국은행 기준금리를 기준보다 비싸게 매수한 부분만 합산한 수치다. 증권가에선 전체 전가 금액을 합산할 경우 조단위 규모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금감원은 “9개 증권사 모두에서 유사한 유형의 손익 이전이 확인돼 업계에 만연해 있었던 방식임이 확인됐다”며 “이번에 확인된 위법 행위로 손실이 발생한 랩·신탁에 대해 금융투자협회와 증권 업계가 협의해 객관적인 가격 산정, 적법한 손해배상 절차 등을 거쳐 환매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전했다.

금리급등 시기 채권 평가손실 누적, 리스크 관리 소홀한 탓

금감원이 이번 업무실태에서 집중 점검한 랩은 종합 자산관리 계좌로, 증권사 운용역이 고객 명의의 계좌를 일임받아 주식·채권·펀드 등 다양한 금융상품에 투자해 수익을 얻는 일종의 자산관리서비스다. 펀드와 달리 단독 운용이 가능해 주로 법인 고객의 단기자금 운용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채권형 랩·신탁 가입 고객은 통상 3~6개월 단기 여유자금 운용을 위해 이 상품에 가입한다. 통상 단기 여유자금 운용은 투자금의 원활한 환매를 위해 단기 유동성 상품에 투자해야 하지만, 증권사들은 CP나 장기 채권을 편입해 운용해 왔다. 랩 고객에게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기 위해 만기가 일치하지 않는 방식으로 운용을 해왔던 셈이다.

문제는 ‘만기 불일치 운용’이 지난해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에 따른 채권금리 급등으로 채권형 랩·신탁에서 운용하던 장기 채권 등의 상품에서 막대한 평가 손실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거래량마저 급감하자 일부 증권사는 채권형 랩·신탁 내 고객 자금을 단기간 환매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회사 고유자산 등을 활용해 법인 고객의 수익률을 보전해 주기 시작했다.

일부-증권사들의-손실보전-방식-예시사진금융감독원
일부 증권사들의 손실보전 방식 예시/출처=금융감독원

지난 7월부터 관련 점검 벌여온 금융당국 “회사에 따라선 CEO도 행정처분 대상”

증권사들의 수익률 보전 의혹이 속속 제기되자 금융당국은 지난 7월부터 주요 증권사 10여 곳을 상대로 업무실태 점검에 나선 바 있다. 당시 점검 결과에서도 대다수 증권사 랩에서 자본시장법상 규제 회피 목적의 교체거래에 대한 모니터링이나 이상 거래가격 통제를 하지 않는 등 적정한 내부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일부 증권사는 선제적으로 자체 점검과 법률 검토를 거쳐 채권형 랩과 특정금전신탁에서 발생한 채권 투자 손실에 대한 일부 손해배상 절차에 들어가기도 했다. 손해배상을 공개적으로 알린 곳은 NH투자증권으로, 지난 9월 25일 NH투자증권 관계자는 “지난 7∼8월 내부감사를 통해 채권형 랩 상품 운용 과정에서 잘못된 업계 관행 등이 있었는지 철저한 점검을 실시했으며, 일부 채권형 랩어카운트와 특정금전신탁에서 만기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 손실에 귀책 사유가 있다는 내부 판단에 따라 최근 선제적인 손해배상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당시 NH투자증권의 관련 랩·신탁 계정의 운용자산 규모는 9조~10조원으로, 손실 규모는 180억원에 달했다.

금융당국은 이번 점검을 계기로 더 이상 잘못된 관행이 지속되지 않도록 시장 질서를 바로 잡을 방침이다. 특히 9개 증권사와 각 사에서 손익전가 거래를 도맡은 운용역 30여 명의 주요 혐의 사실을 수사당국에 제공하기로 했다. 나아가 회사에 따라 최고경영자(CEO)가 행정 처분 대상에 포함될 가능성도 내비췄다. 앞서 금감원은 불건전 영업 관행에 대해 CEO에게 직접 책임을 지우겠다고 시사한 바 있다. 함용일 금감원 부원장은 “컴플라이언스, 리스크 관리, 감사부서 등 어느 곳도 랩·신탁 관련 위법 행위를 거르지 못했다면 이는 전사적 내부 통제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 심각한 문제”라며 “내부 통제의 최종 책임자인 최고 경영진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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